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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30. 21:36 일상의 대화
기사 링크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2) 한국 살레시오회 모지웅 신부/서울신문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2) 한국 살레시오회 모지웅 신부

“Be Happy” 입에 단 청소년의 아버지

서울 영등포구 대림1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은 소년원 수감생활을 마친 청소년들이 사회와 가정으로 복귀할 적응훈련을 받는 곳. 순간의 잘못으로 삶의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했지만 제자리를 다시 찾아가기 위한 마음을 다지고 방법을 배우는, 일종의 재교육장이다. 이곳에서 늘상 ‘Be Happy’(행복하게 지내세요)를 입에 단 채 청소년들의 벗이요, 아버지로 살고 있는 벽안의 노사제가 있다.80여명의 청소년들과 도예, 목공예를 함께하며 인생상담을 소임삼아 사는 5명의 신부 중 유일한 외국인, 모지웅(80·본명 몰레로 산체스·스페인) 신부.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해 평생 가난한 청소년들의 후원자요, 버팀목으로 살았던 이탈리아 사제 요한 보스코(1815∼1888)의 정신과 삶을 한국에서 52년간 이어와 ‘한국의 작은 요한 보스코’로 통하는 이방인이다.

▲ 모지웅 신부
어딜 가도 “나는 모모신부” 자랑

예보에 없던 장맛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던 지난 24일 오후 대림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할아버지들의 넉넉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은 모지웅 신부는 대뜸 성경을 펴들어 손으로 줄을 쳐내렸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복음 25장). 평범한 성경구절이지만, 평생 소외되고 뒤처진 젊은 영혼들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로 살아온 노사제의 삶이 얹힌 때문인지 눈에 쏙 박힌다.

한국에 온 지 10여년쯤 됐을까. 한국의 대학생들이 우연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 몰레로와 비슷한 한국의 성씨 모자를 따 장난삼아 지어준 별명 ‘모모 신부’를 본명보다 더 좋아하는 신부. 처음엔 이름을 놀림감으로 삼은 게 기분나빴지만 나중에 대중가요 ‘모모’의 노랫말을 듣고는 ‘이것이 바로 나의 길’이라는 생각을 갖고부터 어느 자리에서든 “나는 모모 신부”라고 자신을 소개해왔단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 앞에서 한 자의 틀림도 없이 ‘모모’ 노래를 유창하게 불러내는 노사제. 그는 정말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모모인 것일까.

▲ 모지웅 신부
56년 입국 ‘작은 요한 보스코´로 살아

스페인 톨레도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꿈을 키우며 살았다는 모 신부에게 한국은 원래 ‘가고 싶지않은 땅’이었다. 어릴적 중국 선교사를 꿈꾸던 신학생 친척으로부터 중국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때문인지 중국을 향한 동경이 아주 컸다고 한다.

마드리드 살레시오회 신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도쿄 살레시오회 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그때까지도 한국은 “전쟁에 파묻힌 위험한 나라”일 뿐 결코 가고싶지 않은 곳이었다. 살레시오회 일본 관구장이 ‘한국엘 가보라.’고 거듭 권유해 반 강제로 한국 땅을 밟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마지못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해 한강철교를 건널 때였어요. 스페인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불현듯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폭격 맞아 엿가락처럼 엉긴 다리를 건너려는 개미떼 같은 피란민들…. 운명처럼 느껴지더군요.”

1956년 8월13일 낮 12시15분.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시·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그 순간은 원치 않던 땅에서의 새 삶을 다짐한 회심(回心)의 찰나였음에 틀림없다.

사진으로 보았던 한강철교를 넘어 밤차로 광주에 내려가 살레시오 중학교 기숙사 사감을 맡은 게 ‘작은 요한 보스코’ 삶의 시작. 한국 청소년, 특히 어려운 환경의 젊은이들이 털어놓는 속 깊은 생각과 애환을 들어주며 자신도 모르게 요한 보스코가 되어갔다.

살레시오 중학교 교감, 살레시오 중·고교 서무과장, 살레시오 중·고교 이사장 대리, 서울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살레시오회 공동체 원장,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대전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한국에서 52년을 사는 동안 서울 도림동성당·구로3동 본당의 주임 신부시절 6년과 이탈리아 로마 유학 2년을 합친 8년을 빼곤 모두 한국 청소년들의 곁을 지키며 살아온 셈이다.

학교 세워 어려운 청소년에 기술교육

서울 도림동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가정형편상 중학교 문턱을 밟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고, 광주 살레시오 중·고교 이사장 대리시절엔 돈보스코 야간 중학교를 세웠다. 의지할 곳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받아들여 기술교육을 시켰던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재직시절엔 수용하고 있던 청소년들을 전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시켜 어엿한 직장을 잡도록 주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시절 겪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불쑥 꺼내는 노사제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80년대 중반 간첩죄로 몰려 사형당한 아버지의 아들이 있었어요. 교도소에서 사형 직전 수녀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지요. 아들을 우리 청소년센터에 들어와 살게 했는데 말을 끊고 혼자만의 생활에 빠져들었어요.‘아들아 아들아’ 부르며 어렵게 말을 건넸지만 막무가내였는데, 어느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건네며 ‘아버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게 아닙니까.”

모 신부가 세워놓은 야간중학교며 청소년센터를 거쳐간 우리의 청소년은 얼마나 될까. 뜬금없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결혼 주례만 500번을 보았다.”는 말을 돌려준다. 커서 결혼을 한 뒤에도 배필과 함께 찾아와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란 말에 미안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다.“조금 더 잘해줄 것을”. 가정의 행복과 부모의 사랑에서 멀었던 그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기도한단다.

주례만 500번… 아버지라 부를때 뿌듯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이런저런 상을 주겠다는 제의가 쏟아졌고 받았다.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적십자 최고훈장인 ‘인도장’ 금장, 스페인 국왕 훈장에 명예 서울시민증도 받았다. 하지만 “상패들이 어딘가 있을텐데…”하며 자랑삼지 않는다.“상을 너무 많이 받아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이 없을까봐 걱정”이라며 웃는다.

‘전 세계 12억명이 하루 1달러로 살고 있고 5∼17세의 2억 450만명이 노동을 하고 있는 세상’. 인터넷에서 찾았다는 자료를 내밀며 사제가 말한다.“부자들은 자신이 받은 것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결코 잊지 않아요.”

돈보스코 청소년센터에서 학생상담을 하던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해 이곳으로 온 게 지난해 7월. 은퇴했지만 여전히 바쁘다. 화·목요일 이틀은 서강대에서 스페인어·라틴어 강의를 해야 하고 성당들에서도 수시로 강의며 이런저런 도움을 청해온다. 중국 옌지의 국제합작기술학교(공업학교) 후원 책임을 맡아 학생들의 기숙사비며 장학금도 모금해 보내는 일도 큰 일이다.

가톨릭의대에 시신을 기증키로 약속했다는 노사제는 “내 껍데기를 세상에 돌려주는 게 내 일의 마지막”이라며 웃는다.

창문을 후려치는 빗소리가 팔순 노 사제의 목소리에 갇힌다.‘Be Happy’. 어쭙잖은 기자의 이별사에 노 사제가 다시 성경을 펴든다.“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3절).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모지웅 신부는

1928년 스페인 톨레도 출생 ▲1955년 일본 도쿄살레시오회 신학교 졸업, 사제 서품 ▲1956년 한국 입국 ▲1959년 광주 살레시오중학교 교감▲1964년 서울 도림동성당 주임신부, 야간 중학교 설립 ▲1970년 로마 살레시오대 유학 ▲1974년 광주 돈보스코 야간중학교 설립 ▲1979년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1984년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1989년 서울 구로3동성당 주임 신부 ▲1993년 살레시오 공동체 원장 ▲1995년 대전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1998년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사목 ▲2007년∼ 대림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 사목

우연히 도서관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신문가판대를 지켜보는데, 반가운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외국인 신부의 모습이었지만, 영어텍스트로 "Be Happy"라고 쓰인 걸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반가움이 가득하여, 속으로 "신부님이다"라고 되뇌이며 기사를 확인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일하던 돈보스코 직업훈련원에서 저에게 자주 말을 걸어주시고, 쉴새없이 장난을 걸어주시던 신부님, 약간은 새는 발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신부님, 바로 그 분을 이렇게 신문기사로 다시 만나니 마냥 반가울 뿐이었습니다.

제가 본 모지웅 신부님은 정말 남부유럽인다운, (그곳에는 꽤나 많은 외국인 사제분들이 계시는데, 이분은 정말 다른 분들과 구분이 되는 독특한 분이셨습니다.) 살짝 시끄러우시며, 다혈질이시기도 했지만,
인자한 눈매와 조용함에서 묻어나오는 아우라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에너자이저"같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안 맞는 음정에도 씩씩하게 노래하시고, 언제나 행사의 막바지엔 아이들을 향해, "Be Happy"를 큰 소리로 외치시며,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따라하는 모습을 볼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그것을 그대로 즐기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 이것이 정녕 "신뢰"를 넘어선 사랑의 힘이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그런 모습을 다시 떠올리고 있자니, 앞으로 제가 노동시장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배워야할  자세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겐 전 직장은 사실 쉽지않은 관문이었지만,
항시 돌이켜볼 때, 이만큼 HRD에 있어서 이렇게 감성적으로 접해볼 기회가
다른 HR 관련 직종들에 비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노무사만을 벗어나 노동시장에서 효율적인 서비스를 개발하여 제공하고 싶은 저로서는,
이러한 경험들이 클라이언트를 단순한 서비스 수요자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해준,
더불어, 서비스 개발에 있어서 "사람을 위하는",
단순한 이론적 측면에서 밝히는 사람의 욕구를 벗어나,
그들의 마음을 케어하는 것을 배우게해 준 좋은 수련장소였습니다.

비록 짧은 기사였지만,  읽고나니,  보다 더 제가 공부해야하는 목표가 더욱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노선과 열정, 그걸 다시 깨닫게 해준 돈보스코 센터 내에서의 기억과 일꾼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 "Be Happy!" ^ ^
posted by johnjung
2008. 7. 21. 20:52 일상의 대화
내일 아침 비행기로 홍콩으로 여행갑니다.
이번 주는 그런 이유로! 블로그를 휴면상태로 내버려두겠습니다.

다녀와서, 즐거운 여행 기록들과 쇼핑 목록들이 함께하는
포스트들로 다시 만나요.^ ^

posted by johnjung
2008. 7. 18. 17:18 일상의 대화

요즘 하루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두어 공부와 관련없는 책을 읽고 있는데,
최근에는 에니어그램과 관련한 책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에니어그램이란?
http://www.enneagram.re.kr/enne/index.asp에서 확인하세요.
학창시절에 교수님 및에서 서너명과 함께 에니어그램을 약 1년간 공부해왔는데,
그런 프로그램 (당시의 저는 이 에니어그램을 심리 프로그램 이상의 값어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만으로 제 자신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때문이었는지,
에니어그램 검사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지식은 흡수했으나,
생활 와중에서 이 도구를 이용하여 생활해본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리차드 로어 신부가 쓴 "내 안에 접힌 날개"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문득, 내가 나답게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처음에 제 유형을, (저희는 일반적인 에니어그램 모임과 달리, 검사를 통해,
유형을 평가하질 않았습니다. 저희는 에니어그램 모임의 지도자에게서 자신의 유형에 대해 직접
들을 수 있었죠. 그 지도자 분은 분명 경력상으로나, 업적상으로나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에니어그램
전문가이십니다. 그 분의 판단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를 갖지 않습니다.)
사실 감당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에니어그램 유형 중 9번 유형인데, 9가지의 유형 중 현대사회에 가장 도태된 모습을 보이는,
(비슷한 예가 제국열강이 침범하기 전의 남미민족입니다.) 그 유형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는 무엇인가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그렇게 "넌 원래 그래"라고 낙인찍히는 게
싫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위의 책, 역시 그런 언급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 책은 9번 유형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성인(saint)의 유형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모세"와 고래에서 삼켜졌던 "요나"
를 정하면서요, 심지어, 예수님이 9번 유형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까지 묘사를 해냈더군요.

그런 식으로 에니어그램에 강한 호감을 느껴, 한 두세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는 와중에,
오늘 메리 레베카 로가시온이 쓴 "에니어그램"이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9번 유형에 대해서는 정말 새로운 인식으로 접근하고 있더군요.
9가지의 유형 중 가장 정점에 이른, 가장 완성체에 이른 유형이라고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성숙한 9번 유형의 경우를 뜻합니다.)

자세하게 언급하기에는 이 포스트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어렵습니다만,
그동안, 제가 너무 저답게 살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9번 유형의 모습들은 어릴 적에 다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었던 지라,
책을 읽고난 후,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 책에서 언급한 모습대로 사고하는 모습이
전환이 너무나도 순조로왔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의 문제점을 요약하자면, 제가 "감정"유형으로 전환되는 방향으로만 임했었기에,
"의존"적인 모습으로 많이 주변을 대하게 되었고, 주변에서 그런 모습으로 날 인식하고
그에 따른 피드백을 제공할 시에 제 자신마저 뭔가 불편한 상태에서 제 상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런 단점들을 깨달았으니, 보다 제 자신을 찾아야 하는데 노력을 해야할것 같군요.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보다 그것을 순조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집중해야 할 것이며,
게다가, 미성숙한 9번 유형에게서도 빚어질 수 있는 약점을 보완하여.
성숙한 9번 유형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포스트는 에니어그램을 해보신 분이라던가,
심리학계열로 공부해보신 분이나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하튼, 에니어그램은, 그동안 저답지 못하게 행동했던 제 모습을 줄이고,
보다 더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제 안의 내적 여정을 이루어줄 수 있는 도구같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제 자신을 찾고, 제 자신을 보다 성숙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johnjung
2008. 7. 12. 15:48 Review/음악에 관한


어제 아침이었던가, 체육관 런닝머신 앞에 있는 텔레비젼 앞에서, 이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원래 런닝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었는데, 흥겨운 기타리프와 따뜻한 화면에 반해,
원래 목표했던 시간보다 더 많이 뛰면서 이 뮤직비디오를 감상했습니다.

성시경씨가 이미 입대를 했던가요? 어디서 뉴스를 본 기억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 곡은 팬들을 위해 보내는 그의 인사인 것 같군요.
후배한테 들었는데, 유희열과 공동 작사/작곡한 곡이라더군요.
어쩐지 멜로디라인이 반가울 정도로 귀에 익더라니....

사실,이별 앞에서, 이렇게 웃으며 안녕한다는 거 쉽지 않죠.
실제, 제 최근의 이별에서도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서,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상대를 대했지만,
실제, 이별할 때에는 감정이 은근히 새어나와 목이 메었는데,...
아마 상대방도 눈치를 챘겠죠.

다시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하기로 했는데,
괜히 그런 모습 보여서, 머쓱해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이별의 공간 안에서, 그런 감정이 비쳐지지 않는 게 더 우스운 이야기지요.
더구나 보내는 입장이었던지라, 가슴아픔은 도무지 감출 수가 없더라구요.

이별 후에도, 이미 내려진 선택을 아쉬움과 자기 책망으로 한참 돌아봤었는데,...
그래도, 공지영의 최근 서적 "네가 무엇을 하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중에,
딸에게 추천하는 배우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딱 잘라 설명하던 그 구절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별 앞에 담대해지며, 그를 받아들이는 건 언제나 쉽지 않군요.

여튼, 그런 경험 후에, 이 뮤직비디오를 보니 느낌이 다르네요.
흥겨운 리듬 속에 무언가 따뜻한 그림자가 숨어있다고 해야할까....뭐 그러네요.^ ^
정말 간만에 감성이 말랑말랑해지는 영상이었습니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후반부에 나오는 코러스, "웃으며 안녕"이 인상깊네요.

ps. 이 뮤직비디오 장면 중, 슬픈 영화를 본 듯한 손담비를 성시경이 휴지로 눈물 닦아주며
위로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화면에 떠올라있는 장면은 제가 잘 못 본게 아니었다면,
"X-file"의 스컬리의 모습이었는데요.(!)
 X-file의 감성적인 측면을 간과하자는 건 아니지만,
 이거 혹시 X-file에 보내는 오마쥬인가요?
 아니면 사연있는 미장센인가? 여하튼, 재미있네요. 
posted by johnjung
2008. 7. 7. 22:09 일상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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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어머니와 커피를 마시다....

아들 : 엄마, 난 연애가 쉽지 않아.
         난 이제껏 너다섯번은 사귀어봤는데, 한번도 크게 싸운 적이 없어.
         근데, 결과적으로 여자들이 질려서 떠나드라. 여자들이 "이젠 그만하자"래.
         그럼 어떻게 해? 배운대로, 매너있게 울며겨자먹기로 "그래, 이제 그만하자"이러는 거지.
         나 그렇게 매력이 없나? 나 정말 식상한가? 내 연애에 문제가 있나?

엄마 : 그건 간단한 거야. 나도 네 장점을 잘 알고 있지.
         넌 분명 매너있게 점잖게 굴었겠지.
         상대 여자 마음을 맞추어주려고 자신을 접어버리고, 그저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말 안해도 다 눈에 보인다.
         근데, 넌 하나 알아야 해, 대부분의 남자들은 연애 초기엔 다 너와 같지.
         내 아들이라 그런게 아니라, 나 역시 네가 그 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진심은 절대 의심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연애 초기의 남성들이 다 너와 같은 모습이란다.
         넌 그게 참 오래 가는 편인데,....그게 장점이긴 한데,
         장점이란 게 원래 일상화되면 눈에 안 보이게되기 마련이야.
         그러니, 당연한 줄 알고, 결국 자신에게만 맞추어주는 네 연애방식에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거지.
         상대방이 네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위기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하지만, 네 성격 상 꾸며내는 모습도 쉽지 않겠지. 넌 너무 있는 그대로야.

아들 :  하지만, 전 제 강점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사람을 가치중립해서 바라보는 제 시선도, 마냥 상대방을 위해 비추는 제 모습을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따라주고 싶어요.
         그 어떠한 조건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싶어요. "처음이라 그러겠지" 생각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또 그걸 통해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란 것도,.
         보이고 싶어요. 잘 못된 건 아니잖아요? 뭘 밀고 당기고 하나요?
         선천적으로 그런 거 정말 안 맞아요. 연애 잘 하려면, 밀고 당기기 잘 해야한다는 거 너무나도
         많이 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뭐 잘 못되었나요?
         좀 지루하고 식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해서 내가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가치절하된다는 건
         좀 그러네요.

엄마 : 잘 못된 건 없어, 언젠가 아들도 그에 걸맞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꺼야.
         그런 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딘가 있겠지. 넌 정말 그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엔 너에겐 너를 리드해줄 그런 여자가 필요한 것 같아.
         니가 어줍잖은 생각으로 마초적인 의식으로 리드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다면 말이야.
         그리고 엄마 생각으로는 그런 상대방이 아무 조건없이 자신을 그냥 그렇게 받아줄 너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구나.
         사실, 대부분의 많은 여자들이 아무 조건없이 자기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기다리지. 하지만, 타인에게 받은 상처들이 있어 네 진심을 의심하는 거야.
         하지만, 아들아,
         난 네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네 사랑은 어리고 아둔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거짓이 아니란 걸 알아.
         누구나 다 너와 같이 행동하지만, 네 진심까지도 카피할 수는 없어.
         용기를 가지렴,
       
         단지, 사랑이라는 건 순차라는 게 있다는 걸 기억해주었음 좋겠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 아무리 뜨거운 사랑을 나누더라도, 그 머리가 마음을 따라잡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꺼다. 진심이야 의심할 가치 없겠지만, 그런 마냥 뜨겁기만 한 진심을 누가 받아들이겠니?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을 잡으려면, 장갑이 필요하듯. 그런 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다른 그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야.
         
         만약, 상대방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네 마음이 마냥 뜨거워 결국 자신을 상처입힐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 아름다운 포장지를 준비하면 어떨까?
         진심 자체만으로 발광하지 않는냐고 우긴다면, 할말은 없다만,
         왜 선물에 포장을 하겠니? 그것도 다 마음이고, 진심이란다.
         포장지는 포장지 나름의 가치가 있어.  예민한 여자의 감성을 우습게 보지마라.
         그네들은 아주 사소한 점에도 흔들리는 사람들이니까.
        사랑한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안 그래?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니 넌 헤어진 사람이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눈치같구나.
         아쉬움때문에 눈시울까지 슬며시 축축해진 내 모습을 보니, 괜시리 안쓰럽다.
         모르지, 인연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 그 사람이 네 인연일 수도 있겠지.
         
그래. 아들아, 행복하렴, 엄마가 바라는 건, 오직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뿐이야.
네 모습은 지금도, 많이 어리고, 세상살이에 많이 둔탁해보이지만,
그래도, 상대를 어떠한 편견없이 바라보고, 진심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순수란 건 요즘같은 세상에서 독이 될 수도 있다지만, 사랑은 그렇게 해야해.
하루 한 순간, 뜨겁게 사랑하렴. 아무 것도 남지 않더라도, 후회없이.
진심으로, 오직 진심이 있을 때에만 그런 사랑이 가능하지.
그런 마음이 네 짝과 너를 하나로 엮어줄꺼야.
그에 대한 믿음을 절대 저버리지 말렴.
그저 당부하고 싶은 말은, 상대방은 너와 다르게 그 진심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 너의 진심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네가 그 동안 지켜왔던 모습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도록 가꾸어내렴.
당신을 위해 그렇게 공들여 온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게.
엄마는 네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결혼이라던가 그런 거 이제 그만 신경쓰고 그저 누군가를 만나, 행복감을 누리렴.
아무래도 좋다, 내 아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엄마도 마냥 좋을 것 같아.

아들, 힘내. 네 마음은 지금도 반짝반짝 빛나.
언젠가 그 빛줄기를 따라 네 인연이 네게 다가올꺼야.
그저 네가 할 일이라곤, 지금의 네 마음을 보다 반질반질하게 광을 내는 것뿐이야.
또, 달빛은 달무리가 있어 오히려 운치가 있지.
네 흐려진 마음을 너무 걷어내려고만 하지도 말고,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렴.

솔직히 네 사랑은 영리하지 않아.
하지만,그런 모습이 난 밉지가 않다.
오히려 너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줄어들어버린 것같아,
더 정겹지않은 이 곳에 너와 같은 모습을 더 많이 보았으면 좋겠어.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야. 진심으로.
보내는 마음, 나도 해봐서 알지만, 정말 견뎌내기 쉽지 않지.
가끔 사랑이라는 건 그 어떤 미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많은 노래와 글들이 사랑의 달콤함과 쓴맛, 그런 극단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전부 다 순간들이란다. 추억을 만들어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지.
엄마는 그냥 사랑이라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꽃같이 그저 화사한 것 같아.
피어나는 모습도, 시들어버리는 그 모습까지도 화사하지.

사랑에는 여러가지 단면이 있으니, 네가 벌써부터, 사랑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모습이 네겐 그저 초라해보일 지도 모르지만, 난 지난 그 시간동안 행복했다.
지날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나니 그  괴롭고 외로웠던 순간들도 다 행복한 나날들이었던 것 같다.
다시 사랑하고 싶지? 그렇게 될 꺼야.
넌 그럴 자격 충분하고, 네 마음을 받아줄 사람은 있을 꺼란다.
넌 그저, 그녀들이 의심치않도록, 네 마음을 예쁜 포장지에 둘러싸렴.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좀 흐트러져도 좋아.
구색을 맞춘다는 말, 기억하지? 그렇게 공을 들여온 마음이란 걸,
당신을 위해 피워온 마음이란 걸, 그렇게 보여주렴.
우리 아들은 날 닮아서 창의적인 사람이란 걸 알지.
넌 아마 그렇게 자신의 맘을 너만의 방법으로 꽃피워낼 수 있을 꺼야. 그렇게 하렴.

근데, 요즘 마끼아또를 자주 마시네? 아침 안 먹고 나왔는데 배고프지 않아?
우리 아들, 폼 잡는다고 수고하는구나.^ ^ 그러지말고, 여기 샌드위치 좀 먹어봐.


posted by johnjung
2008. 7. 7. 21:21 일상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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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는 형님들과 나이키 휴먼 레이스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10km짜리 레이스인데, 솔직히 저는 1시간 안에 가볍게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형님들 생각은 다르시더군요.
21살 때, 이와 비슷한 행사에 나가본 적이 있는 저로서는 1시간 도달이 그리 어렵나 생각했는데,
그 때와 비교해서 현저히 떨어진 체력과 늘어난 체중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은근히 들더군요.

그러고보니, 학창시절에는 항상 규칙적으로 밤만 되면,
다이어트의 목적으로 그 넓은 학교를 여러바퀴 돌곤 했었는데요.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 언제나 점호 이전에 1시간 정도 뛰던 행동을
이젠 헬스클럽 외에는 뛰어본 적이 없군요. 예전에는 참 많이 뛰었는데. (덕분에 살도 엄청 빠졌었죠...)

이제 약 2달 간 준비할 시간이 있는데, 저 역시 체육관 외에는 뛸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
형님들과 마찬가지로 런닝머신을 시속 10km/h로 맞추어놓고 연습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겠네요.
그래도, 그 동안 자전거로 갖춘 체력도 있고, 런닝도 그동안 안 한건 아니니,
2달동안 하루 1시간 정도 연습하면 그래도, 그 시간 안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런 행사에 참가할 친구들이 주변에 없어서, 혼자서 쓸쓸하게 참여하고,
끝나고 혼자서 터덜터덜 돌아왔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참 좋네요.
(사실, 이번 행사도 제가 계획한 게 아니라, 형님 중 한분이 권유하셔서 같이 뛰게 된 거에요. ^ ^)

여러분도 어떠세요? 참가수익금의 50%를 UN난민기구, 랜스암스트롱재단, 세계야생동물기금들에
자동기부하는 이 축제에, (축제가 맞고 말구요, 많은 사람들히 함께 스타트를 끊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 뭉클하죠.^ ^) 같이 참여해보시면 어떨까요?
무료한 삶 안에서 지쳐있으시다면, 이 도전이 그 일상에 획을 그어줄 수 있을 겁니다.

posted by johnjung

아침에 꽤나 늦게 일어났엇죠. 한 9시경이 되어서야 찜질방 밖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분명 해남의 맛집들도 어젯밤 많이도 귓동냥으로 들었지만,
아침부터 그런 집들이 영업을 개시할 순 없겠죠. 그저 근처에 보이는 백반집에 들어가,
김치찌개로 식사를 마치고, 땅끝마을로 가는 길을 향합니다.

0123

땅끝마을로 가는 도중에 보도 여행을 하는 처자 둘을 만났는데,
도무지 인사를 건네기조차 어려워 보일 정도로 피곤해보이더군요. 그냥 살짝 웃고 지나갔는데,
수건으로 얼굴을 완전 감싸고 길을 걷는 그들의 모습에서 땅끝이 거의 다 왔음을.
더불어 그들의 뒷모습에서 아직 그들의 여행은 끝나지않았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완도와 땅끝마을로 가는 방향이 77번 국도에서 갈리는데,
자전거 여행자들은 주의해야합니다. 이 길이 가시권에서 잘 드러나지 않아,
완도가는 길로 가실 공산이 크기 때문이죠.
저같은 경우에는 완도로 건너가는 다리 앞에서, 안내하는 의경에게 물어봐,
다시 땅끝마을로 향하는 도로를 탈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완도로 갈뻔했죠.
만약 갔더라면,...아마 일정이 하루 더 길어졌겠지요. ^ ^

그렇게 해남에서 땅끝으로 가는 길이, 이번 여행 중 가장 언덕이 가장 잦았던 구간 같습니다.
그것도 좀 길고요, 경사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기어 변경을 맞추어 무리하지 않고
나아가니 역시 탈만 하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한번 정도는 자전거를 끌고 가고 싶었던 건
인정해야겠군요. 은근히 찍은 사진이 많은 걸 보니 말입니다. ^ ^
지나가는 아름다운 들꽃과 수양버들이 어찌나 그렇게 반갑던지...ㅋ

012

그렇게 언덕을 올라가다보니, 땅끝마을까지 순회를 하신 많은 여행자들의 흔적이 보이더군요.
저처럼 자전거를 타고 순회하신 분, 걸어서 오신 분들께서 돌로서 이 보도의 벽에 흔적을 남겨놓으신 걸 보고,
저도 중간에 자전거를 멈추어놓고 제 이름을 남겨놓았습니다.
약하게 남겨놓아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추억 아닙니까? ^ ^

012


마지막 여행일이라 그랬을까요? 제가 봐도 마음 안에 여유가 피어난 게 보이네요.
그렇게 힘든 언덕들을 올리다 보니 거의 다 왔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네요.
이 때,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는 이 표지판 후에 만난 내리막길에서
막 신나서 소리지르고 그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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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에서 잘 보시면 "전망좋은 곳"이라는 표지판이 보이실 겁니다.
저도 여행 초반에는 "어디?어디?"하면서 열심히 주의를 살피며 페달을 밟았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 의미는 "전망좋은 곳" = "언덕 위"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저도 처음에는 좋아했지만, 나중가서는 "언덕이구나. 꿀꺽.."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표식으로
다가왔었죠. 제가 보기엔 "오르막길 시작"보다 더 공포스러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땅끝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땅끝기념비만 찍고 식사를 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모노레일 앞에서 어물전을 하시던 할머니 분이 전망대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땅끝탑을 보고
내려오는 게 좋다고 하셔서, 자전거를 주차하고 전망대를 향하는 모노레일에 올라탔습니다.
모노레일은 서서히 올라가고,  그 밑에서 내려다보던 땅끝마을과 그 마을을 둘러싼 해안가,
그리고 저 멀리 보이던 바닷가들은 절경이더군요. 혹시 땅끝마을에 가신다면,
모노레일을 타실 것을 권장해드립니다.

012

그렇게 오른 땅끝전망대였습니다.
그다지 특별한 건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망대였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전 그제서야 이번 여행이 끝났음을 알게되었죠.
이곳이 제 종착지였음을 알게 되니, 몸과 마음이 확 풀려버리더군요.
그래요. 내달린 몸과 마음이, 드디어 여기가 끝임을 알게 되니,
그저 확 풀려버리더군요. 벌써부터 소감이야기 하기엔 좀 이른데.....^ ^
그래도 그 때의 기분을 좀 전해드리고 싶어, 동영상으로 제 자신을 찍어놓은 모습을 올려드리죠.
정말 이 때의 모습은 이 때밖에 못 누릴 것 같아요.

※주의 : 지금 제 얼굴은 바닷바람과 도로의 먼지들과 무자비하게 발라진 썬크림의 잔재물로 인해
상당히 더러운 상태랍니다. 마음의 준비를 좀 해주세요. ^ ^






전망대에서 그렇게, 여행의 종료를 만끽하고, 내려와 몇몇 공간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장마전선이 제주도에서 도착해서 그랬는지, 바닷바람이 꽤 세었지만.
그래도 관광객들은 꽤 있어서 사진도 찍어주고 찍힘도 당해 개인사진도 몇장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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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탑도 가보고, 많은 사람들이 땅끝마을에 가면 꼭 찍는다는 등대도 배경으로 두고 사진을 남겼습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던 어린 친구들에게 "서울-땅끝마을까지 자전거로 여행했다"고 말해주었더니,
깜짝 놀라더니, 지나가며 "우리들도 다음에 자전거여행으로 여기에 올까?" 이러더군요. ㅎㅎ

사실 땅끝탑은 어디 있는지 찾질 못해서, 처음에는 가질 않았는데,
알고보니 안으로 좀 들어가야 있더군요. 몸도 피곤하고 차 시간도 거의 다가와
가지말까 생각했으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하는 마음으로 땅끝탑까지 보고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새해의 일출을 감상한다고 하던데...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소원을 적는 공간이 있더군요. 그래서, 그 곳에 저도 제 소원을 적고 왔습니다.
이루어지길 빌며, 해남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그곳을 나왔습니다.

헤남으로 가는 버스를 타니, 바로 해남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주더군요.
그곳에서 서울로 떠나는 막차인 5시 30분 차의 표를 끊고,
30분 정도 기다리다 자전거에 차를 싣고 저녁식사 거리를 사러 갔습니다.
(점심 이야기가 없었지요? 점심은 그냥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했거든요.)
샌드위치를 하나 사고, 여행 종료를 자축하고자 맥주 한캔을 샀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향했지요. 그것으로 이번 여행이 끝이 났습니다.

너무 여행동안 무얼 했는 지에 대한 기록만 담겨 있죠?ㅎ
보시는 데 살짝 지루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전거여행자들에게 좋은 Guide line의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도로 사정이라던지, 유의해야할 점이라던지,
그런 내용이 별로 없네요.
아무래도 혼자 간 여행이라 그랬는지,
생각할 게 좀 많아서, 그런 걸 별로 느끼질 못했던 것 같아요.
음...좀 무책임하긴 하지만, 여러분들도 그냥 밟으시면, 힘든 거 별로 느끼시지 못하고
라이딩을 즐기실 수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ㅎㅎ

이번 여행이 제겐 첫번째 자전거 장거리 운행이었습니다.
갑작스레 계획했던 여행이었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었는데요.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떠나니, 떠나지더군요.
사실 떠나는 것에 대한 준비가 많은 것을 요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 마음이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신다면,
당신도 이런 여행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렵게 생각마세요.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했는데요. 뭘. ^ ^

여러분도 이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으세요?
그럼 어렵게 생각마시고, 제가 했던 방법 그대로, 여행을 계획해보세요.
성취감만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갈 느끼실 수 있을 꺼에요.
이번 여행에 대한 감성적인 느낌들은 차후에 포스트할께요.
(아직 여행기가 끝이 난 건 아니에요! ^ ^)

posted by johnjung
2008. 6. 30. 23:55 일상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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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급히 여권을 찾아야할 일이 있어, 방을 뒤지다가,
우연히 제 책상 밑의 서류 가방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외형상으로 보아도 구형으로 보여지는 쌤소나이트 가방,
여권을 찾다 찾다 지친 마음에 "혹시 여기에 있는 건 아닌가"하는 마음에,
가방을 열어 보았습니다.

가방을 열자, 잘 정리된 수첩들과 여러가지 측량용구로 보이는 도구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 그렇구나. 아버지께서 오래 전에 쓰시던 서류 가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모 건설회사에서 근무하셨었는데, 그 곳에서 쓰시던 측량용구와 회사수첩, 예전에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하셨을 때 사용하셨을 외국인노동자 관련 수첩, 뜬금없는 벨트와
회사에 다닐 때, 가지고 계셨던 명함이 들어있더군요.

왠지 아버지 명함을 하나 가지고 있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한장을 빼어들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이제 남은 게 이런 명함 밖에 없다는 생각에 왠지 허망해졌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병으로,...아무래도 직장생활 도중 얻은 스트레스가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면, 오히려 가족이었는지도요.
그 당시에 아버지는 병에 대한 선고를 받으시고, 이어 그와 관련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을 그만두시고, 집에서 쉬고 계셨는데,
집에 있는 걸 못 견뎌하시고, 회사로 빨리 복귀하시려고 서두르셨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병이 재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린 어머니에게 하신 말.
"내가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는 말씀,.
아버지는 회사 복귀 후 끝내 재발한 병으로 인해 돌아가시게 되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아버지가 좀 더 집에서 안정을 취하셨더라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꺼라고,...
그래, 아버지에게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자신이 생각하던 장남으로서의 입지에서 어긋나지 않는 자존심과 지켜야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던 모양입니다.

남은 가족들은 그런 모습보다는 보다 더 옆에 있어주길 바랬는데 말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보여준 그 모습들은 제게도 큰 의미로 와닿아 있습니다.
물론 방식은 다르지만, (저라면, 가족들과 더 함께하는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가족"이 삶 속에서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해주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내일은 저희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너무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마저 가물가물합니다만,
왠지 오늘만큼은, 당신에게 아들로서 생일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행동이 그저 무모한 모습만은 아니었다고,
당신이 남긴 것은 저런 물건들과 명함같은 것들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에 대한 소중함이었다고,
이 아들은 덕분에 그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걸 함께 말씀드리고 싶군요.

생일축하합니다. 아버지.
제가 표현하는 모습은 당신과 다를지라도, 우리가 중점하는 가치는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제가 어긋나지 않도록 지켜봐주세요.
posted by johnjung
2008. 6. 28. 00:16 일상의 대화

원래 오늘의 계획은, 천안 아산에 있는 성훈이형네 집을 다시 방문해서,
이미 그곳에 방문하고 계신 이규영 지휘자님과 그의 딸, 채은이와 금요일을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노네요. 이러다 정말 홍콩도 가겠네...._)

그런데 어젯밤, 동원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접속한 인터넷에서 세종법학원에서
"공인노무사 시험설명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와 관련해 공부방법이라던가,
여러가지 노하우를 접하고자, 아산방문을 취소하고, 저녁시간에 오래간만에 서울대입구역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한 세종법학원. "선착순 100명"이라는 문구에 좀 여유있게 도착했지만,
도착해보니 저 포함 둘이더군요. ....ㅡ.ㅡ;
그래도 시작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약 20명 정도의 구성원에서 설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시험 자체와 공부방법과 관련한 유인물들이 개인에게 하나씩 돌아갔지만,
설명회는 이를 설명하는 그런 구성이 아니었고,
"꽤나 어려워진 1차시험의 중요성 강조"와, "선배노무사들의 노하우 소개"가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합격수기는 자주 보아왔지만, 합격수기의 주인공들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듣는 합격에 대한 노하우들은 제게 공부를 하는 기술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는, 다소 막연했던 공부에 대한 마음가짐을 확연하게 비출 수 있던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2008년 1차가 어려워지고, (전년대비 합격자 수가 현저히 줄어들어버렸지요, 응시자는 더 많았는데.,)
2008년부터 최종합격자수를 200명으로 지정하고 게다가,
2010년부터는 시험 자체의 구성이 바뀌는 이 시점에,
2009년 시험이 쉬어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

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덕분에, 좋은 동기유발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johnjung
그 새벽 5시 반, 페달을 밟긴 했지만, 오히려 마음이 더 앞서 내달린 라이딩이었습니다.
그냥 빨리 땅끝마을에 도착하고 싶었습니다. 관광이라던가 먹거리들이, 내게 와닿지않던
이유는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제 마음 탓이었을 겁니다.
그냥 땅끝마을에 도착하면 적어도 작은 깨달음이라도 발견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
길을 선회하여 23번 국도를 향해 페달을 밟았습니다.
금일의 목표는, 그저 땅끝마을이었습니다.
남들은 24시간만에 간다는 그 길을, 나도 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며 페달을 밟았습니다.
고창도 금방이고, 어느 새 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영광의 어느 오르막길에서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곤함으로 인해 멈추어섰습니다.
어느 버스 정류장 앞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잠시 누웠습니다.
누워서 마음을 정리합니다. 피곤함으로 한풀 기가 꺾인 혼란스러움은 마음을 가다듬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수면은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우연히 제가 있는 언덕을 오르는  자전거 무리들을 만납니다.
영광 내 자전거 클럽분들이신 모양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손을 흔들어 인사합니다.
그리고나서, 누웠다가 일어나 멍하니, 주시하고 있는데, 그 분들이 다시 돌아오시더군요.
"아니, 아직까지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ㅎㅎ"
그 말에 미소로 답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2시간 정도가 지났더군요.
네 맞습니다. 이러고만 있으면 안 돼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언덕을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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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의 나비축제가 끝나고 얼마되지 않았더군요, 국도 길가에 이런 조형물들이 많이 놓여져 있더이다. 하지만, 전 이걸 보고 생각나는 게 있어 마음이 좀 그랬었죠.


언덕이라 하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이번 여행을 하면서, 길이 국도라 워낙 순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심한 언덕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울-천안까지는 신호등도 많고,
시내를 관통하는 길이 많아, 시간이 좀 소모되서 그렇지 심한 언덕이라고 볼 건 없는 것같습니다.
천안 - 영안까지의 도로는 어디서 들은 것처럼, 정말 중급자라면 평속 30km라도 밟을 정도로,
무척 순하더군요, 언덕도 그리 많지 않고, 다닐만했습니다. 근데, 확증하기엔 조금 어려운 게,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다보니, 언덕에 대한 감도 별로 없고, 올라도 그런가보네,이런 인식으로 여행했기에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하지만, 차후에 말씀드릴 월출산을 지나가는 언덕과 해남에서 땅끝마을로 이동하는 도로는 분명
무리로 작용할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언덕이죠.
맘 한번 다지시면, 올라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지나가던 도중,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습니다.
식당은 백반 전문집이었는데, 주변에서 공사를 하던 이분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이었던
모양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여행에서 그나마 가장 전라도스러운 백반이었다고 기억합니다.
확실히 현지민을 상대로 하는 밥집인지라, 제 기대에 부흥했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노곤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물을 물병에다 담고, 다시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오후 11시에 도착하는 한이 있더라도 "땅끝마을"에 도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안근처에서 또 다시 멈추어서게 됩니다.
내리쬐는 땡볕에 오른쪽 손목이 시끈하게 느껴집니다.
아뿔싸, 안 타려고 긴팔까지 준비했지만, 라이딩의 폼상, 소매가 위로 걷어진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시끈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갈길을 재촉합니다.
하지만, 피곤한 몸은 휴식을 원할 뿐입니다.
그러고보니, 이번 여행 중 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해본 적이 없음을 떠 올립니다.
어쩌면 그 동안의 여행의 피로가 몸에 깃들어버린 것일까요?
이 해답은 해남 도착 후 알게 됩니다.
그러나,좀처럼 나갈 수 없는 이 여행 앞에, 깊숙히 자리잡은 어지러운 마음은,
내게 잠깐의 휴식 이후, 다시 나아가야함을 일깨워줍니다.
다시 페달을 밟습니다. 어느 새 강진, 해남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고,
해남에 어느 정도 다가왔다 생각하던 순간, 들린 휴게소에서
해남과 땅끝마을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듣게됩니다.
전 해남 = 땅끝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승용차로 40-50분 거리가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적어도 해남까지는 가자, 거기가서 생각하자.라고 마음먹고,
김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페달을 밟습니다.
그 때 시각이 5시반 정도....앞으로 해가 지려면 2시간 반 정도 남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서둘러서 페달을 밟습니다. 몸의 노곤함은 지금 이렇게 언급하기도 지루할 정도였지만,
그 당시의 제겐 "해남까지 가자"는 목표의식 외에 다른 생각은 없더군요.
게다가 정신 하나만큼은 또렷했기에, 혼란스러움이 가중되기 전에
페달을 더 밟아야했습니다. 그런 제게 월출산을 올라가는 그 도로는 제게 기운을 내게하는 좋은
루트였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힘들게 올랐지만, 한번도 쉼없이 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저는 제 체력이 꽤 약한지 알고, "끌바"(자전거를 타지않고 끌어 올라가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하자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 중 단 한번도 끌바를 하지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대단합니다. 이번 여행을 대비해서 특별히 훈련한 것도 없었는데요.
한강변도로의 "서울-암사"를 한번 밖에 왕복한 것뿐인데,...여튼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일입니다.
012

그렇게 그 오르막을 오르고 나니,
주욱 뻗어져있는 내리막길은 그동안 올라온 오르막길의 고행을 씻어버리기엔 충분햇습니다.
그 이후에 있던 언덕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어렵지않았구요. 다닐만합니다.
그러나 오후 8시가 지나자, 찾아온 어둠은 사고의 위험성을 잔뜩 내재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적어도 해남까지는 가야했기에 후미등만 켠채, 길을 재촉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버스들과 자동차들은 이미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에, 겁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네들이 혹시나 나를 보지 못하고 갓길 쪽으로 지날까하는 생각에 서둘러 해남으로 향했습니다. 해남읍내에 도착하니 어느새, 오후 8시 30분 정도? 편의점에 도착하여 휴대폰을 충전하고,
역시 밥먹을 곳을 알아봅니다.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건데, 정말 전주민이 가이드화 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참고로 휴대폰 충전하는 곳을 찾질 못해서, 편의점을 4군데 정도 찾아야했는데,
그곳에서 물어보니, 어느 정도 다 이야기해주시더군요.
특히나, 부안에서 경험해 본대로 타지 사람이 선호하는 음식점과 현지 사람이 선호하는 음식점을 나누어 설명해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너무 피곤하여 그저 가까운 한식집
"아지매 식당"에 들어가서 갈비탕을 시식하고, (그래도, 반찬은 전라도입니다. 무슨 5000원짜리 갈비탕에 반찬이 그렇게 많이 나온답니까?) 가까운 찜질방에 자전거를 주차했습니다.
꽤 많은 시간을 주행해서 속도계를 들여다봅니다.
부안에서 출발할 때에는 누적거리가 270km였는데, 도착하고 들여다보니 440km였습니다.
하루동안 170km를 달린 셈입니다. 여행 시에는 100km 이하가 적당하다고 들었는데,
마냥 페달을 밟다보니 이만큼 달리게 되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자전거를 오래 타지도 않았고, 그다지 즐기지도 못해,
이번 여행에 있어 무리해서 퍼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을 보니, 나도 체력은 대한민국 남성 평균 이상만큼은 되겠구나하며
약간 으쓱했습니다. 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많은 분들이
평균 이상이 아니라 괴물 수준이라며 놀라워하시더군요. 더욱 으쓱했으나,
저보다 더 대단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고개를 수그리게 됩니다.
만약 , 그런식이라면, 자여사는 괴수대동산인건지....당일치기로 자전거를 타고 대전까지 내려가서 목욕하고 올라오시겠다는 분도 있는 곳인데....

오늘의 피곤은 감내하기도 어려웠지만,
마음이 내달린 만큼, 그만큼 , 지쳐버린 것인지,
수면실에 가서 눕자 잠이 절로 왔습니다.

 
posted by john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