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다재단은 프라다 트랜스포머의 세 번째 프로젝트로 스웨덴 출신의 아티스트 나탈리 뒤르버그 (1978년 스웨덴 리스킬 출생)와 작곡가 한스 버그(1987년 스웨덴 래트빅 출생)의 협업으로 진행되는 현대미술전을 오는 8월 15일(토)부터 9월 13일(일)까지 경희궁 앞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트랜스포머의 내부는 바로크풍의 관능적인 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흰색 펠트로 주름을 잡고 꼬아 장식했다. 뒤르버그는 오브제와 영상물을 바닥과 벽에 표현함으로써, 흰색 펠트의 색조를 누그러뜨리고 트랜스포머의 내부를 무의식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동굴과 같이 변모시켰다.
앞서 진행됐던 스커트 전시회의 육각형면과 영화제의 사각형면에 이어 회전된 십자형 바닥에서(십자형면을 바닥으로 회전한) 희미하고 어지러운 동굴 안에서 유일하게 시각적으로 눈을 잡아끄는 것은 회색 펠트로 덮힌 바닥이다. 그 위에 크고 작은 전시 오브제가 설치되고 조명을 더해 장관을 연출한다. 이미 2008년 프라다재단을 통해 밀라노에서 전시된 바 있는 감자, 고인돌 그리고 작은 고래와 유사한 오브제는 전시의 일부로 애니메이션과 함께 구성된다.
더불어 트랜스포머의 내부에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뒤르버그는 최대 크기의 화면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영상을 쏘아 마치 피부와 같은 흰색 벽면과 공생관계의 교감을 나누는 듯 표현하였으며, 이는 마치 작가의 시야에 비춰진 튀틀린 풍경이 확장되어 선보이는 것과 같다.
2009년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우수 젊은 아티스트에게 주어지는 은사자상의 영예를 안은 뒤르버그는 스톱모션 기법을 사용하여 점토인형들이 등장해 초현실적이고 종종 그로테스크풍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단편 애니메이션 영상물을 제작되었다. 이야기를 위한 공간은 원시적이지만, 작가 고유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제작했다. 뒤르버그의 영상은 성적인 연상, 공포감, 잔혹함과 사악한 행위 뒤에 숨겨진 즐거움을 들춰내는 이야기를 통해, 보는 사람들에게 모호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뒤르버그의 작품은 강박적인 리듬이 특징이며 모순과 해학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를 통해 불안, 향수, 불편함을 자아내고, 때로 순수한 고통을 전달한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은 작가의 모든 작품에 사용된 배경 음악을 통해 더욱 강화되는데, 곡은 스웨덴의 촉망받는 작곡가 한스 버그(Hans Berg)가 작곡했다.
나탈리 뒤르버그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스웨덴을 대표하는 차세대 아티스트이자 국제 무대에서 가장 활동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뒤르버그는 2008년 밀라노의 프라다재단에서 단독으로 개최했던 전시를 비롯해 비엔나의 쿤스트할레 빈(2007), 스톡홀름의 페어그파브리켄(Färgfabriken, 2006) 등에서 단독 전시를 했다. 뒤르버그의 영상물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2009),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2007), 뉴욕의 P.S. 1 현대미술센터(2006), 베를린 제4회 현대미술 비엔날레(2006) 등에서 상영된 바 있다. 뒤르버그의 작품은 현재 베니스에서 열리고 있는 제53회 비엔날레 아트전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외에도 뉴욕 현대미술 박물관(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 열린 ‘After Nature' (2008) 및 ‘Performa' (2007) 등 수년간 여러 단체전시에 참여한 바 있다.
한스 버그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일렉트로니카/테크노 장르의 전자음악을 작곡하고 있으며, 2004년 이후 뒤르버그와 협업하면서 뒤르버그의 작품에 맞는 음악을 작곡하고 있다.
전시회 일정:
장소: 프라다 트랜스포머
일정: 2009년 8월 15일(토) - 9월 13 (일)
시간: 화, 수요일: 낮 12시 ~ 오후 6 시
목, 금, 토, 일요일: 낮 12시 ~ 저녁 8시
휴관일: 월요일
주소: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번지 경희궁 앞뜰
입장료: 무료, 홈페이지를 통한 사전 예약제
홈페이지: www.pradatransformer.co.kr
전화: 02 737 4772
1차 시험이 끝났을 때였던가 어느 신문에서 경희궁에 프라다가 트랜스포어라는 임시건물을 지어,
예술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순간, 경희궁과 현대적 구조 시설물과의 이질적인 조합에 매력을 느끼면서 호감을 가졌습니다.
과연 어떨까. 그러다 설치미술 전시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보고,
그것도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출신의 신예라는 이야기에 혹해서 보러가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게 있어 설치미술의 영상작들은, 짧은 시간에 빠져들만한 포인트를 제시하지 못하면,
보통 끝까지 보게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비엔날레처럼 영상이 주도구로 쓰인 설치미술작
이 많은 전시회에서는 그냥 지나치게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통 그 과정 정도에서 그 작품이 무얼 나타내는가가 드러나지않는 이상,
쉽게 지나치게되는 게 영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치 미술 작가의 개인전시회가 열린 이 공간은,
제게 있어 영상이 가미된 설치미술 자체에 집중하게 된 첫번째 케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녀가 첨부된 브로슈어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녀의 전시된 세 작품들은 시종일관 불안을 다룹니다.
폭력, 억압, 상해 같은 요소들을 통해 불안을 그려내고,
그런 불안을 반복적인 음악을 통해, "언제나 어느 때나 일어나는 일."이란 관념을 통해,
더욱 끔찍하게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참 아이러니한게, 그 영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표현이
클레이 에니메이션인지라 눈으로만 보게될 때에는 무척 순화되어, 구더기가 시체에 모여드는
장면마저, "눈으로만 보게될 때에는"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트랜스포머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윤회와 같은 개념이라던지,
변형에 대한 철학적인 의미를 고찰하는 작품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는데,...
뭐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달리지는 것이니까요...:)
작품은 4개 정도 있는데, 한 에니메이션 당 약 5-6분 정도의 시청기간이 필요합니다.
총 30분 정도,...굉장히 짧으므로, 보고 나서도 "우리 뭐 봤어?""뭔 말하는지 모르겠어." 등의
대화가 이루어질 공산이 큽니다. 그러니, 작가와 관련하여 첨부자료를 읽어보고 가신다면,
조금 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끼시려면, 감상 후 읽으시길.
- 또 하나의 전시물, 트랜스포머.
사실 나탈리 뒤버그 전보다는 이 건물 자체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전시가 있을 때마다 건물 철골 자체를 크레인으로 들어
새로운 면을 바닥으로 쓴다는 그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가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우직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이 행위 자체가 퍼포먼스같았구요.
위의 사진에서 나오는 현대적 건축물이 경희궁 앞마당에 놓인다는 것 자체가,
경희궁 앞의 가우디? 이런 느낌일 것 같아서 기대를 머금었으나,...
그런데 실제로 본 건물은 이미 무슨 막으로 뒤덮여져있어서 기형적인 작태더군요.
일종의 큐브를 기대한 저로서는 약간 기형적인 천막에 불과한 모습에 좀 실망했습니다.
더불어, 사이즈도 좀 많이 작아서,,,,웅장한 큐브를 기대했건만,....
총평.
짧게 요약하겠습니다.
- 나탈리 뒤버그의 전시는 매우 짧고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나처럼 영상이 가미된 설치미술을 좀처럼 감상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정도 들를만 하다.
- 프라다의 트랜스포머는 생각보다 별로다. 이건 헬기타고 공중에서 봐여 그 자채가 확연히 드러날 듯,
일단 막도 좀 걷고....
- 이걸 보기 위해 종로 나들이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무료라고 한들, 좀 그렇다.
종로나들이를 하실 예정이시라면, 다른 스케쥴도 함께 잡으시길,
이를테면 보테로 전이라던가...
(제 생각에 미술관으로서의 운치는 서울시립보다는 역시 덕수궁 미술관입니다.)
솔직히 이 영상을 처음 봤을 때는 미국 안의 한국인을 조롱하는 영상처럼 보여
처음에는 솔직히 기분이 안 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뭐랄까. 미국문화 내의 한국인들을
그들의 문화 외곽선상의 미개인으로 다루는 듯해서, 순간 순간 웃음이 터지긴 했지만,
왠지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이러면서 즐겨찾기에 추가해두고 있었다.)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원래 mad tv가 워낙에 막 나가는 케이블 코메디 방송이긴 해도)
백인우월주의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문화의 인식에 대한 편견 사이에
벌어지는 해프닝을 재미있게 그려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로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무척 우습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고 그러네요.
하지만, " You have to 목욕"에서는 정말 쓰러지고 맙니다. 크하하하. :)
1. 주지하는 대로 작년 12월 초에 이번 제45회 사법시험 2차시험의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이 시험에는 5,012명이 응시하였는데, 그 중에서 80%을 넘는 4,107명이 적어도 한 과목에서 과락기준인 40점을 채우지 못하여 과락하였다고 한다. 결국 애초 예정되었던 합격정원인 1천명을 채우지 못하고 905명만이 합격자로 발표되는 전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현행의 과락제도가 과연 논의의 여지 없이 설득력 있는가, 수정하거나 보완되어어야 할 사항은 없는가, 또는 아예 없애 버려야 할 것인가, 채점의 구체적 운영이나 그 기준에는 문제가 없는가 등도 살펴보아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현행의 제도 아래서라고는 해도 2차시험 응시자의 80%이상이 과락에 걸렸다는 사태는 아무래도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사법시험공부」 또는 「고시공부」라고들 말하는데, 이 고시공부도 결국 법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고시공부란 법률가가 되려고 하는 법공부라는 뜻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법률가가 되려면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그 고시공부의 성과를 평가하는 공식의 절차인 사법시험에서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만큼 법공부가 엉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2. 사실 많은 학생들이 법공부 또는 고시공부를 엉성하게 하고 있다는 징조는 이미 훨씬 전부터 확연히 나타났다. 나는 전에 사법시험 채점평을 쓰면서 그러한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고시계 1999년 12월호에 게재된 제41회 사법시험 채점소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동호. 201면 이하). 좀 길더라도 귀기울여 주기 바란다.
“근자에 법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민법을 공부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과서를 착실하게 읽어 기초를 차근차근 다져나가지 않고, 처음부터 사법시험 준비용 단권서를 익히고 또 그것을 익히는 것만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책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은 민법의 이런저런 문제를 체계없이 정리하고 언필칭「최신」이라는 판례와 정체 모를 학설들을 늘어놓은 그야말로 雜書에 불과하다. 자신의 머리로 민법의 체계를 종합적으로 구상?조감하면서 밀고간 것이 아니어서, 문제의식이 단발적?즉흥적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도대체 문제 자체가 어떠한 관련에서 제기되어서 어렵게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남의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대응의 결론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문제를 인지하고 그것이 전체의 맥락에서 어떻게 위치하는가를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장래의 법을 떠매고갈 학생들이, 가장 중요한 「법적으로 사고하기」를 수련함에 있어서 항상 선봉을 차지하였고 또 차지하고 있어야 할 민법의 공부에서, 이러한 잡서에 그리고 그것만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는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취지의 지적은 이번의 사법시험에서 다른 법과목의 채점평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형법의 시험위원이었던 李相暾 교수는 채점소감에서 다름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시계 2004년 1월호, 204면 이하)
“지금의 수험생들이 사법시험에 대비하는 과정, 아니 법학을 공부하는 전 과정을 관찰해 보면 단권화에 포함되어 있는 법학의 기본에 대한 공부마저 사라진 모습이 확인된다. 심지어 일류대학의 법과대학 강의실에도 여러 종은 커녕 한 종의 교과서마저 외면한 채 처음부터 고시효율성에 편향된 요약(문제)집을 들고 들어 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요약집은 이론의 맥락을 거세함으로써 가능한 책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렇기에 이해보다는 암기에 중점이 놓일 수밖에 없고, 논증보다는 도식화된 설명에 수험생을 길들인다. 요약집의 이 결함은 문제집의 그 상상을 초월한 두꺼움으로도 결코 매울 수 없다. 실전응용력을 반복된 훈련으로 높여주는 문제집의 과도한 풍요로움이 고시기술적 적응력을 키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법학의 기초를 튼튼하게 해 줄 수는 없다. ... 무더기 과락사태는 고시효율성에 희생된 법학공부의 정의가 일으킨 저항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이 사법시험 준비만을 위한 요약서에 의존하는 풍조는 민법뿐만 아니라 형법에도 퍼져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민법공부에 관한 한 그 후로 그러한 기운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상업적 동기에 좇아 대학교수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저술」한 그러한 요약서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그 공급이 다시 수요를 새로이 창출해 내고 있는 듯하다.
3. 그런데 이번 사법시험합격자발표가 난 후로부터는 여기저기서 종전의 공부방식을 청산하여야 한다는 반성의 소리가 들린다. 일찍부터 이것을 주장해 온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 글은 내가 법공부의 방식에 대하여 평소에 생각해 온 것을 거칠게 정리해 본 것이다. 과연 이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설득력이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여러분에 앞서 법공부를 했고 요즈음도 그 공부를 하고 있는 선배의 경험과 그것을 스스로 반성한 결과로 생각하여 주면 족하겠다.
Ⅱ. 법공부 일반에 대하여
1. 열심히 공부하는 것
(1) 평범한 말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하루 할 만큼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열심히 한다는 것은 단지 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일 그가 얼마나 그 일에 마음을 모았는지에 따라 결과가 현저하게 달라진다. 그것이 사람이 하는 일의 큰 특징이다. 공부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여기서「열심히 한다」는 것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법공부에 두고, 정신을 여기에 모아야 한다. 熱心이라는 말에는 보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서 뜨겁게 달구어진 마음, 즉 전심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인가각 중요하다. 「열심히 한다」고 하려면 이와 같이 열심히 공부하는 시간이 - 강의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 - 하루에 최소한 5시간은 되어야 하고, 방학 중이라면 적어도 8시간은 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러나 너무 지나쳐서는 안 된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쉬는 것 또는 노는 것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려면 쉬고 놀아야한다 이것 역시 사람 마음의 자연적 문법에 속하는 바다. 정신을 너무 오랫동안 팽팽하게 감아두면 그것은 탄력을 잃는다. 그러면 읽는 책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단지 눈이 활자 위를 스칠 뿐이게 된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법공부는 장거리뛰기와 같다. 공부해야 할 것이 끝도 없이 많다. 당연한 것이, 법은 人間事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다만 사비니가 말한 대로 그 인간사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본”것일 뿐이다). 그러니 장거리주자와 같은 자세로 공부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느긋하게 세상의 온갖 맛을 다 보고 세상의 온갖 풍경을 다 구경하면서 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조급히 서둘러서도 안 된다. 마라톤에서 주자들은 100미터 경주에서처럼 뛰지 않는다. 일정한 페이스를 지켜가면서 꾸준히 뛴다.
물론 쉬고 놀면서도 그것을 당연히 「열심히 공부한」 끝이어야 한다. 자신이 이러한 휴식을 얻을 만큼 충분히 공부하였는지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3) 결국 열심히 공부하고 또 쉬다가 하다보면, 초반의 어디쯤에서 어떤 리듬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학생이라면 공부의 규율은 스스로 배우게 되어 있다. 사람은 모두 다르므로,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맞는 리듬이란 없다.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리듬을 찾아내서 그에 맞추어 가면 된다 그 리듬이라는 것도 식단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 갈 것이다. 마음이 단련되어 가면 리듬도 달라지게 되어 있다.
이 리듬 또는 규율은 동시에 자기에게 부과한 기준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과표로 표현되기도 하고, 공부계획표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계획표」를 어떠한 사정 아래서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지켜야져야할 것으로 스스로에게 납득되어 있어야 한다.
(4) 리듬이든「계획표」든 반복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 또는 이번 주와 다음 주와 그 다음주가, 또는 이 달과 다음 달과 그 다음달이 동일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공부에서는 반복처럼 효율적인 것이 없다.
매일 5시간씩 공부하면 1주일이면 35시간을 공부한다. 그리고 하루 건너씩 매일 10시간을 공부해도 1주일이면 마찬가지로 평균 35시간을 공부한다 그러나 전자가 훨씬 낫다. 매일 반복하면 가속도가 붙는다. 어제 공부했던 것에 대한 기억이 생생해서 오늘 읽는 것이 무슨 맥락에서 무엇과 관련되어서 논의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간에 맵을 놓고 아예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페이스를 다시 찾는데 흔히 기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조금씩이라도 매일 계속해서 하는 것이 좋다. 만일 “삶이 다람쥐 채바퀴 돌듯 이렇게 메말라서야!”하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는 그녀에게는 공부를 하고자 하는 결심이 없다고 또는 약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삶은 그렇게 무미건조한 수련을 통하지 않으면 결국 메마른 것이 되고 만다는 것도 덧붙이고 싶다.
2. 강의를 듣는 것
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법학과목을 수강한다. 그런데 강의를 듣는 것은 법공부에 매우 유용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첫째, 강의를 통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알 수 잇다. 강의하는 교수는 대체로 「교과서」를 그대로 읽어내려 가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덜 중요한 것은 간단하게 언급하거나 그냥 뛰어넘는다. 이러한 경중의 관별은 단지「교과서」를 읽고만 있어서는 얻어지지 않는데, 공부하여 할 것이 매우 많은 만큼 그 판별은 더욱 유의미하다.
(2) 둘째, 강의에서는 지금 다루고 있는 법제도 또는 법률문제 등에 한정하여 설명하기보다는 그 법제도 등이 다른 법제도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이 법률문제가 어떠한 보다 기본적인 문제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이와 관련되는 법문제로서는 어떤 것이 있는지가 아울러 설명된다.
그런데 「교과서」는 전체가 한 덩어리인 것으로 쓰여진다. 민법처럼 여러 권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도, 「교과서」는 그 전부를 하나인 것처럼 다룬다. 그리고 기것해야 관련 법제도 또는 관련 법률문제를 괄호 안에서 “어디어디를 참조하라”는 식으로 지시할 뿐이다. 그러나 강의에서는 많은 경우에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이 행하여진다.
법제도나 법률문제 간의 상호 관련을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법공부의 포인트이다. 법을 공부하는 주요한 목적의 하나는 마치 의학도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의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법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법적 분쟁은 「교과서」에 쓰여 있는 개별의 법장치 하나만에 의해서는 바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의를 통하여 이러한 「맥락」과「관련」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3) 셋째, 대학교수는 각자 전공이 있어서 그 전공분야를 심도 있게 연구한다. 그리고 그 연구의 과정에서 얻은 것을 강의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교수가 연구의 과정에서 얻는 것은 비단 개별 법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다고 여겨지는 해석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해도 될 터인데, 법을 바라보는 시각, 그것을 다루는 방법, 나아가서 좋은 사회, 옳은 삶에 대한 견식도 있다. 「교과서」에는 어떤한 법률문제에 대한 결론만이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강의에서 개별 법문제를 다루는 경우에도 교수는 자신이 왜 그러한 결론을 취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게 된다. 강의를 들음으로써 학생들은 고기 몇 마리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고기를 낚는 법을 은연중에 익히게 되는 것이다.
(4) 넷째, 강의를 하는 교수는 자기 나름의 정리된 입장이 있다. 어느 규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떠한 법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공부는 이와 같이 다양한 견해를 잘 듣고 어느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는지를 판단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의 「교과서」에만 매달리면 그러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버릇을 들이기가 쉽지 않다. 강의를 통하여 여러분은 보다 다양한 입장에 접하게 된다. 그렇게 여러 가지 견해에 접해 보는 것은 여러분의 사고를 훈련하는 데 매우 좋은 일이다.
(5) 학생이 강의를 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늘 새삼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자체가 괴이한 일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 대학의 교수들로부터 특히 고시공부를 한다는 학생들이 강의를 소홀히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 역시 대학교수인지라 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공부를 하는 학생들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3. 차례와 때를 지키는 것
(1) 법공부에서는 앞서도 말한대로 해야 할 것이 매우 많다. 그런데 거기에는 차례가 있고 경중이 다르다.
법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물론 법의 분야는 매우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법은 잡다한 소재를 기준 없이 열거해 놓은 것이 아니고, 기초적인 법들과 그 법들의 원리나 기술을 전제로 해서 이것을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보다 특수한 영역에 관한 법들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법을 배우고 이해하려면 먼저 배워야 할 것과 먼저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해서 나중에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먼저 기초적인 법분야로부터 잘 배우고 그 다음에 보다 특수적인 또는 보다 첨단적인 법분야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교육과정은 그러한 순서로 짜여져 있고, 대학의 법학커리큘럼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면 법과대학 또는 법학과의 교과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현재 행하여지고 있는 것에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그 커리큘럼은 오랫동안 법학교육을 행하고 받은 경험에 입각해서 신중하게 짜여진 것이고, 아무 생각없이 배열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초적인 법분야로 헌법과 민법과 형법을 드는 데 별로 이론이 없다. 사법시험 제1차시험에서 이 세과목을 시험이 되고 있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나중에 배울 것을 먼저 공부하게 되면 힘이 갑절이 든다. 나중에 배울 것으로 된 법분야는 대개 먼저 배워야 할 법분야의 법리를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드면 상법을 보면 거의 맨 앞에 상행위에 관한 규정이 나오는데 (상법 제46조 내지 제168조), 그것은 민법을 공부하지 아니하고는 체계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또 어음?수표 기타 유가증권에 관한 법리는 민법의 채권총론, 특히 채권양도의 제도를 알지 않고는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법공부는 차례를 지켜서 하여야 한다. 사법시험에서 헌법?민법?형법이 별다른 이의 없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법공부는 차례를 지켜서 해야 하고, 강의를 듣는 것이 법공부에 극히 유용하다면 법공부를 때에 맞추어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귀결이 거기서부터 당연히 나온다. 즉 교과과정이 편성되어 있는 대로 강의를 듣는 동안 응분의 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법과대학 또는 법학과의 통상적인 교과과정을 전제로 한다면 개별의 법학과목이 개설되는 1학년 2학기부터는 교과과정에 맞추어 법공부를 「열심히」(그 뜻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하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특히 대체로 2학년 1학기에는 헌법?민법?형법 등 중요과목의 강의가 한꺼번에 쏟아지므로, 이들은 제대로 쫓아가려면 비상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3학년을 마칠 때까지 약 2년 동안 강의를 따라가면 열심히 공부해 두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극히 중요한 2학년, 3학년의 시기를 초점없이 지내 놓고서 뒤늦게서야 법공부를 한다고 돌려 책상 앞에 앉고 보면, 강의를 다시 들을 수 없고 차례도 지키지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군분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교 2학년, 3학년을 극히 중요시하여야 한다.
나는 선배 학생들이 새로 대학에 들어온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대학게 들어오면, 우선 1년 정도는 실컷 노는 것이 좋다. 그래야 법공부 또는 고시공부라는 장거리경주를 할 힘이 모아진다는 것이다. 「잘 노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 동안 마냥 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실은 아예 공부의 끈을 놓아버려서 웬만해서는 다시 공부에 손대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 적어도 책상 앞에 돌아와 전심으로 공부하게 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선배들의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4) 요즈음 법학을 전공하지 않으면서 법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전에 비해서 많이 늘었다. 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더라도 대학을 졸업한지 한참 후에야 다시 법공부를 시작하는 경우도 증가하였다고 들었다. 그러한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그처럼 때를 놓치면 법공부는 그만큼 더 큰 노력과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전공 여하를 불문하고, 또 원래 법공부를 하여야 할 때를 비록 놓쳤다고 해도 역시 그 공부에 차례는 지키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할 것이다.
Ⅲ. 민법공부에 대하여
1. 민법공부의 중요성
민법공부는 법공부 전체에 있어서 막중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법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민법, 그중에서도 민법총clr의 교과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 실제로 법공부를 하여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민법이 법공부의 반 또는 그 이상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잘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이야말로 민법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한 전제이고 출발점이다.
(1) 민법은 사람이기만 하면 일상적으로 문제되는 사항, 즉 쉽게 말하면 재산관계와 가족관계 중에서 보편적인 것을 규율하고 있다. 그런데 온갖 종류의 재산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양상을 잠깐만이라도 생각하여 본다면, 또 남녀관계 나아가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등이 얼마나 착잡하고 다양한가를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즉 한 마디로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그 능력과 욕구와 희망에 좇아 얼마나 다채로운가를 생각하여 본다면, 민법 그 자체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규율대상마다 그 전개의 양상에 맞추어 규정을 「원칙/예외」그예외에 대한 예외...와 같이 다층적?복안적으로 구축하여 가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 다양한 규율 사이에 모순이 없도록 논리적?체계적 자리를 마련하여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층적?복안적으로 구축된 민법을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법 일반에 두루 통용될 수 있는 법적 논리의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2)그리고 민법이 규율하는 내용은 자족적이어서, 다른 법영역에 마련되어 있는 규정이나 제도를 원용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만큼 요건과 효과를 주도면밀하게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상법을 보면, 상행위에 관한 규정은 물론이고, 회사나 해상운송에 관한 규정 등 어디서나 이러저러한 경우에는 손해배상책임을 지게 된다는 규정이 다수 있다. 그러면 그 손해배상을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한 범위에서 하여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상법 자체에 이들 문제에 대하여 특별한 규정을 두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예를 들어 상법 제137조), 그러한 특칙이 없는 한은 상법에서 정하는 손해배상책임에 대하여도 민법 제393조로부터 제399조까지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상법상의 손해배상이라고 해도, 피해자에게 발생한 모든 손해가 아니라 그 중에서 「통상의 손해」에 한정하여 배상하는 것이 원칙이다(민법 제393조 제1항). 또 그 손해배상은 원칙적으로 금전으로 하며(민법 제394조), 가해자에게 과실이 있으면 이를 고려하여 손해배상액을 감경하거나 아예 배상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민법 제396조). 상법은 그 맨 앞의 제1조에서 “상사에 관하여 본법에 규정이 없으면 상관습법에 의하고 상관습법이 없으면 민법의 규정에 의한다”고 하여, 민법이 보충적으로, 그러나 일반적으로 상사에도 적용됨을 일반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명문의 규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체계해석상 민법은 당연히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이상은 비단 상법에서 정하는 손해배상책임분만 아니라, 예를 들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환경정책기본법,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제조물책임법 등에서 정하는 손해배상책임에 대하여도 다를 바 없다.
(3) 민법은 역사적으로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발전하여 가장 완벽하게 전개된. 다시 말하면 「끝까지 생각된」법기술을 담고 있다.
이는 주로 근대 이후에 입헌주의나 죄형법정주의가 자리를 잡은 후에 비로소 체계적으로 전개된 헌법이나 형법의 제도나 이론과 대비하여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른 많은 법영역은 민법으로부터 개념이나 명제를 차용하여 스스로의 제도나 이론을 전개하거나, 적어도 민법상의 개념이나 이론 또는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해서 자신이 다루는 사항의 「특수성」에 좇은 특별한 법리를 발전시켜 가고 있다. 이는 특별사법의 대표적인 상법은 물론이고(예를 들면 상법 중 해상법이나 보험법은 해상운송계약법 또는 보험계약법으로 민법상의 계약법리를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앞의 Ⅱ.3.(2)에서 본 대로 어음?수표법도 민법이 정하는 채권 양도에 관한 일반법리를 수정?보충한다는 관점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민법의 실행절차법인 민사소송법(가령 「청구」의 개념 등), 나아가 민법과 관련이 별로 없을 것 같은 행정법(가령 그 기축적지위에 있는「행정행위」의 개념 등) 등에 있어서도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에 민법은 다른 법영역에 존재하는 「흠결」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4) 한편 민법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많은 법률이 있는데, 그 중에서 민법은 앞서 말한 대로 1천 1백개 이상의 조문으로 되어 있는 최대의 법률이다. 또한 민법은 많은 특별법은 물론이고, 민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제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부속법률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도 역시 통상 민법공부의 범위 내에서 다루어 진다. 현재의 법과대학 또는 법학과의 대체적인 교과과정상으로 보아도, 민법은 대체로 6개의 단위(민법의 각편을 하나의 단위로 하되, 다만 채권편은 이를 총칙과 각칙(또는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두 단위로 하고 있다)로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걸쳐 있으며, 그 외에 「사법입문」이나「민법연습」또는 「재산법특강」등이 마련되어 있다.
2. 몇 가지 방법의 제안
(1) 이처럼 민법은 매우 방대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야 하는 것이고, 또 그 노력은 상당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민법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다른 과목에 비하여 훨씬 공부하기 어렵다는 것, 특히 현행의 사법시험제도가 가량 민법에의 배점 등을 통하여 그 어려움을 제대로 평가하여 주지못하고 있다는 것, 민법이 제1차시험에서도 필수과목으로 정하여져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선다형으로 출제되어 법적 사고의 성숙도보다는 단편적 법지식에 의존하기 쉽고 따라서 법공부가 아니라 사법시험이라는 것만을 놓고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생각한다면 「요령 좋게 민법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또는 「민법에서 과락만을 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남보다 앞서가는 길이라고 생각될 소지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여야만 제대로 된 법률가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법률가를 자가의 「일」로 선택한 이상, 그리고 그「일」이 삶의 보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상, 그 출발점으로서 제대로 법공부를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하에서 여러분이 앞으로 민법을 공부해 가는 데 있어서 요령이라고 할 것들을 들어두기로 한다.
(2) 우선 「교과서」를 읽는 것에 대하여
(가) 법공부는 「교과서」를 읽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법공부에 자료로서보다는, 추상적 명제를 체계적?종합적으로 서술하는 학문적 작업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과서」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과서가 아니다(이것은 내가 「교과서」를 괄호 안에 써 온 이유이다. 이하에서는 이를 제거하기로 한다). 따라서 초학자가 이를 통하여 법의 속살을 알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현재의 상황에서는 교과서를 통하여 법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 실제로 교과서를 착실하게 읽고 소화하는 일은 극히 중요한 일이고, 모든 법공부의 가장 기초적이고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교과서는 저자(들)이 일정한 체계를 세우고 이에 맞추어 어떠한 분야의 법을 균형 있게 서술한 것이다. 그것을 다 공부하고 나면 머릿속에 민법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질 수 있고, 민법상 제도들의 복잡한 얽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잇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소설처럼 한 번 죽 읽고 책장에 박아두는 성질의 책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고 읽는 과정에서 비로소 조금씩 윤곽이 떠오르고 의미가 이해된다. 그 「파악」의 고통스로운 긴 과정을 견디어 내는 것이 바로 법공부다. 그것은 몇 달사이에 해치울 수는 도저히 없고, 아마도 최소한 1년 동안 앞의 Ⅱ.1.에서 본 바의 「열심히 하는 공부」에 의하지 않고는 어찌하여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요약서 등으로 피해 가려 해서는 안 된다.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거기 돋아난 이파리만을 뜯어서 죽 펴쳐 놓고, “이것이 나무요, 나무요” 하고 외친들, 듣는 사람이 나무를 알 수 있을 건가? 땅 속 깊이 박힌 뿌리에서 땅 위로 튼실한 둥치가 솟아 오르고, 거기서 줄기가 분수처럼 뻗어나가고, 그 끝에 수많은 잎이 싱싱한 초록빛을 내며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나무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다) 교과서를 읽어가는 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a) 아마 처음 한두 번은 전체에 대한 개관을 얻기 위하여 죽 훑어보는 것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로는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쓰여있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고 넘어가야 한다.
(b) 자신이 읽고 이해한 바를 자신의 말로 다시 써 보는 것이 좋다. 한 단락이 끝나면 그 단락의 내용을 요목식으로 정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c)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여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은 모르겠는 점을 적어두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후에 이에 관련되는 서술이 다시 나오고, 그 때 비로서 앞서 알 수 없었던 점을 알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d) 교과서에 인용되어 잇는 판결을 찾아 읽어라. 편결을 읽을 때는 그 요지만이 아니라 판결 전부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판결의 내용을 ① 사실관계. ② 원고가 청구하는 바와 그 청구의 법적 원인(민사소송법에 말하는 청구취지와 청구이유), ③ 판결에서 문제된 법적 쟁점, ④ 그에 대한 대법원(필요하면 원심도)의 판단과 그 이유, ⑤ 사건의 결말(원고의 청구가 전부 또는 일부 인용되었는지, 기각되었는지)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라.
(e) 「참조」표시가 되어 있는 것(교과서에“...참조”라고 쓰여 있는 것은 “참조하라”는 명령이다)은 그 부분으로 가서 읽어야 한다.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그 의미를 알고 넘어가야 한다.
(f) 여러분의 흥미를 끄는 법률문제에 대하여는 때로 그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찾아서 읽어 보는 것도 유익하다. 법학논문은 그것이 잘 쓰여진 것이라면 , 교과서에서는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시각과 이익형량을 제시할 것이다. 설사 그 논문의 결론에 백 퍼센트 동의할 수 없는 경우라도, 통설적 견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할 바나 그 난점을 찌르고 나올 것이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법적 논의의 방식에 보다 익숙하게 도면서, 동시에 거기서 다루어진 법리를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g) 읽은 양에 집착하여서는 안된다. 모든 공부가 그렇듯이, 민법공부도 체계적으로 하여야 함은 당연하나, 통상 하는 방법, 즉 민법총칙 교과서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거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꾹 참고」그냥 몇 번씩이고 읽어가는 것은 가능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는 할 수 있어도 역시 우둔한 방법이다.
(h) 학설대립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 학자들은 구체적인 법률해석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상대방의 입장의 난점을 지적하기 위하여 필설을 다하여 노력한다. 그러나 법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 견해 대립이 기본적으로 어디서 연유하는가를 파악함으로써 족하다. 특히 실제로 법적 처리에 별다른 차이를 낳지 않는, 또는 차이가 있다고 해도 매우 예외적으로밖에 문제되지 않는, 극히 미세한 법률논의에 말려 들어갈 필요가 없다(그러한 의미에서 민법총칙의 초입에 태아의 권리능력을 둘러싼 소위 정지조건설과 해제조건설의 대립이 제시되어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과격한 충고를 하자면, 이 부분의 서술은 아예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3) 법전을 항상 곁에 두고 참고하여야 한다.
(가) 법전은 모든 법공부의 출발점이다. 법조문이 인용되어 있으며, 언제나 법전을 들추어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교과서」는 말하자면 법전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풀어 해석하고 거기에 법전이 규정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충하면서 체계를 세운 것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어느 하나의 법규정을 읽고 난 다음에는, 우선 그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고 달리 되어 있지 않은 이유, 즉 입법이유를 잘 생각해 보라. 그 규정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이익이 증진되고 어떠한 목적이 실현되며, 반면에 어떤한 이익과 목적이 희생되거나 후퇴하는지를 따져보라. 그리고 그 규정과 관련된다고 교과서에 적혀 있는 제도 도는 규정을 찾아서 읽어 보라. 그리하여 어느 하나의 규정을 보면, 바로 그 관련제도 등이 곧바로 연상되도록 익혀 두라.
(나)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자신이 법적으로 논의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법조문을 인용하는 것이다. 성문의 법조항은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1차적이면서도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法的 談論이 결국「근거지움」의 문제임을 생각한다면, 이와 같이 강력한 근거를 동원하지 아니하는 또는 동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법률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아직 충분히 받지 못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버릇을 들이기 위해서는,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번거롭게 법조항을 인용하는 것이 좋다.
그 인용의 방식 등에 대하여 몇 마디 해 둔다.
첫째, 법명을 지시함이 없이 그냥 “126조” 또는 “390조” 등과 같이 인용하여서는 안 된다. 법명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하 민빕의 규정은 법명의 지시 없이 인용한다”는 뜻을 미리 밝혀 두어야 한다.
둘째, 법조항을 우리나라에서 통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인용하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 126”등이 그것이다(한편“§ 126조”와 같이 쓴 예도 있는데, 이것은 §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탓이리라). § 표시(=Paragraph)는 예를 들어 독일민법전에서는 조를 가리키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스위스나 프랑스에서도 민법전의 조를 §로 표시하지 않고 Artikel 또는 article로 되어 있으며 그 약어는 Art. 또는 art.이다). 혹 이 방식으로 인용할 것을 고집한다면 이 경우에도 “이하 법률의 조는 §로를 서서 표시한다”는 듯을 별도로 지적할 필요가 있을는지 모른다.
셋째, 법조항의 인용은 빠짐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또한 세부적으로 하여야 한다. 한 조에 둘 이상의 항이 있고 그 중 한 항만이 문제되는데, 또는 본문과 단서가 있고 그 중 본문 또는 단서만이 문제되는 데, 그냥 “○○조”라고만 하여서는 안 된다.
(4) 마지막으로 이해하는 것도 외우는 것도 다 중요하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
(가) 다른 모든 공부에서도 마찬가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아울러 무조건 외우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는, 우선 교과서의 추상적 명제가 어떤한 구체적 사실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가를 눈 앞에 그려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교과서에 인용되어 있는 판결을 찾아 읽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나) 그렇다고 해서 외우기를 외면하여서는 안 된다. 「외우기」는 특히 공부의 초입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공부방법이다. 물론 외워야 할 것을 구별해 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일단 중요한 정의나 개념, 중요한 법제도의 기본적 내용은 외워야 한다.
Ⅳ. 小結
1. 무릇 모든 공부는 엉성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엉성하게 공부하느니 노는 것이 낫다. 어른들은 늘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귀찮도록 말하지만, 시살은 잘 노는 것도 이 거친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놀면서는 그래도 자신이 비워 둔 정신의 빈터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게 되어서 언젠가는 그것을 채우려고 씨름하게 된다. 그것이 사람이 마음의 구조이다. 그러나 공부를 한다고 늘상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으면서 요령만 피우고 있으면, 공부를 한 듯한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아주 공을 들여서 공부한 듯한 착각도 들게 하는 것이다.
의사가 엉성항 지식을 가지고 환자를 다루면 환자의 건강을 나쁘게 하고 아예 죽일 수도 있다. 엉성하게 공부를 한 사람은 아예 의사가 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 법률가도 마찬가지다.
2.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하는 것은 법공부의 어느 한 단계일 뿐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고 해서 법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비록 요행으로 사법시험에는 합격하였을지는 몰라도, 법공부를 엉성하게 하였으면 엉성항 법률가밖에 될 수 없다. 전처럼 사법시험 합격자가 기껏해야 몇 십 명밖에 안 되었던 때에는 고시에 붙었다는 것만으로 혹 일생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정원이 1천명이 된 요즈음에 엉성한 법률가로 지내는 것은 헛된 명예와 고통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 공부할 때를 놓치지 말라. 그리고 열심히 또 제대로 공부를 하라. 길고 정돈된 수련만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즐거움과 휴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오래 전, 공인노무사 시험에 있어 민법은 사실 공인중개사 정도의 출제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주요 조문 외우면 통과선은 될 정도였다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요즘 공인노무사의 민법 출제 수준은
사법고시 출제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비슷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균 60점만 넘기면 되는 공인노무사 수험자들과 사법고시 수험자들을 동일시할 수는 없죠.)
사실, 민법의 이해가 어느 정도 되지 않으면, 법관련 공부에 있어 학습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외워서 공부한다기보다는 어떠한 법리로써 답안을 작성해야하는 법관련 시험에 있어서는
기본적 맥락이 없다면, 요점을 제대로 잡아내지는 못하고, 여러 부연설명만 곁들이는
낮은 점수의 답안지만 작성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의를 진행했던 모 노무사가 작년 시험에 떨어져 낙담하던 제게 시험이 끝나고,
9월까지의 공백기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민법을 공부해서, 리갈마인드를 잡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했는데,
정말 1년간 법공부를 나름 열심히 해보니, 민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통달하게되면,
기본적인 법리가 숙달되어 법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하지만, 대부분의 법관련 시험 수험생들이 4-5년 공부하듯이 그 과정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제 블로그를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많은 분들이 "공인노무사"와 관련해서 들어오시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되실까해서,
더불어 앞으로 제가 이 공부를 더 하든 안하든, 힘든 시기에 제 자신을 추스리게 했던 게시물인,
양창수 교수의 민법공부에 대한 게시물을 올려봅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초창기 시절에는 수험서보다 양창수 교수가 쓴 민법입문이란 교양서 기준의
책자가 흥미발현에도 좋고해서 한번 읽고 시작했었는데요. 문득,..그 때가 기억이 나네요. :)
이번 주, 금요일에 친구들과 함께 의정부 직동수련원 안의 통나무집에서 M.T를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동네친구들과 갔던 건지라,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그 곳으로 가기 전에 시간을 내어, 그 곳에서 바베큐를 할 고기들을 인터넷으로 구입했습니다.
사실, 인터넷에서 고기를 구입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처음에 바베큐에 쓰일 고기를 인터넷에서 구입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을 때, 많은 친구들이
"아무래도 그런 육류는 인터넷이라는 창구가 그다지 믿을만한 곳은 아니지않나?"라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알고보면, 동네 정육점도 마찬가지 아니냐. 내가 전에 먹어봤는데,
나쁘지 않더라."는 말로 협상, 구입하였습니다.
일단 가격이 생각보다 더 저렴하더군요.
돼지고기 갈비살 2kg과 수제 소세지 300g을 택배비 포함 약 17,000원에 구입하였습니다.
고기의 질에 있어서는, 양념도 적정하게 잘 배어져있고, 보통 정육점에서 파는 양념갈비와 딱히
다르지않습니다. 오히려 시중 정육점에서 판매하는 양념갈비에 비해 덜 짜서,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들었구요.
고기의 양에 있어서는 성인남성 4인이 적당하게 먹을만한 양 정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배부르게 먹으시려면 아무래도 조금 더 사셔야할 듯 싶구요.
저희는 그 양을 성인남성 셋이서 먹었는데 정말 배불러서 더 이상 다른 음식은 시식하지 못하겠더군요.
사실, 인터넷이라는 창구 매체가 사실상 신뢰성을 갖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소비자는 오직 그 제품에 대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는 웹페이지의 이미지를 토대로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지라,
-판매자가 열어 보이지 않는 - 상품의 부정적인 면을 파악해낼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신체로 즉각적으로 유입되어 영향을 주는 식품류에 있어서는 더더욱 신뢰가 요하게되는
사항인지라, 사실 저도 인터넷으로 육류를 구입하는데 있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구입하는 데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제품인가" 의 기준이 오직 구입평과 관련댓글로 할 수 밖에 없기에,
괜시리 "뽑기"같은 기분으로 고기를 구입한 것인데,
시식해본 결과,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만족스러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식품류는 구매하기에 앞서 걱정이 뒤따르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구매후기를 적어 올려서, "괜찮다"는 쪽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참 못 믿을 세상인 것같습니다.
이 향수는 Amber, 호박향인데, 이런 향은 처음 써봅니다.
근데 그 향기가 무척 매력이 있군요.
뭐랄까,
제가 종전에 쓴, 그러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남자향수의 인식이
무언가 남성다운 이미지에 대한 덧붙임의 기능을 했다면,
이 향수는 한 남성이 가지고 있는 감성의 디테일한 면모를 드러내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런 경우, 보통 이미지가 가벼워져서, 무게감이 약해질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베이스가 어느 정도의 무게가 있어서 남자향수의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사실 향 자체가 시원한 이미지랑은 거리가 있어 여름에 쓰기에는 좀 그랬는데,
종전에 쓰던 이세이미야케, 불가리보다는 이 향 자체가 그들과 차별되는 매력이 있어서,
가끔 기분전환 삼아 몇번 뿌리기도 했습니다.
종전까지 쓰던 향수가 타인들을 위한 예의로서 쓰여진 것이었다면,
내 자신이 써보고 만족한 향수는 이 제품이 처음이 아닌가 싶군요
곧 가을이 찾아들텐데, 그 때쯤부터 본격적으로 뿌리게될 것 같습니다.
추신. 함께 들어있는 로션도 역시 호박향입니다.
호박향의 로션은 향수보다 향이 조금 더 진하지만,
왠지 더 선호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시 맘에 듭니다.
꽤 괜찮은 전시인데, 잘 알려지지않은 것 같습니다.
인천 시내에서는 어디를 가나 광고안을 볼 수 있었는데,
일요일에 사람이 정말 한 50명이 채 못되었던 것 같더군요
덕분에, 비엔날레 중에서는 가장 맘편히 (사람들에게 안 치이며) 보게 된 기억으로 남게 되었군요.
비엔날레의 꽃인 설치작품, 퍼포먼스도 일시마다 잘 배치되어있는 느낌이고,
무엇보다, "이걸 뭘로 했지? 어떻게 만들었을까?"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있었던지라,
지금과 같은 시기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기획전을 가는 것보다야 진정 백배낫다라고 생각하며,
한 4시간 정도, 쉬지않고 주욱 봤던 것 같습니다. (작품이 좀 많긴 해요. 그것도 다 본건 아니었다는...ㄷㄷㄷ)
저는 작품 비치에 있어 딱히 꾸며지지않은 자유로운 전시모습이 비치는 것 같고,
더불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전시 커미셔너의 센스가 엿보이는 전시장 구성도 그렇고 해서,
개인적으로 전시장 모습이 맘에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시에 있어서 소흘한 점들을 많이 언급하시기도 하시던데,
(사실, 싱크대 그냥 두고,그런 건 좀 그렇긴 했죠.)
몇몇 씬에서는 그래도 굉장히 "와 잘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인지라, 저는 나쁘진 않았어요.
아쉽다면, 이런 작품전-그러니까 여성작가들로 한정된-에서
작가들이 제시하는 감성, 이를테면 여성들이어서 말하게 되는 내밀한 감성에 대한 이야기가,
남성인 저에게는 어떤 궤적 정도로 밖에 파악이 안 되는 것같아서,
(만약 제가 여성이었다면 어떤 형태가 있는 덩어리로 느껴졌을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작품들에서 그런 감성의 내음새를 파악하게 되더라도 이질적이었던지라
사실 조금 갸우뚱하게하는 경우가 좀 잦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생각해도 설명해주기가 많이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작품 앞에서 "이게 뭐지?"하며 꺄우뚱하고 있는 남성을 많이 양산할 쥬디 시카고의 그림 앞에서,
- 굉장히 유명한 작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대중적이지는 않으니까,..-
"이건 여성 성기가 테이블 위에 올려있는 모습입니다."이러거나,
자, 빙수를 만드는 설치작품입니다.이 빙수틀은 젖꼭지 모양이죠.
이건 여자의 유방을 상징해요" 이러기는 좀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
(참고로 전 2년만에 만나는 제 초등학교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랑 갔는데,
전 내색 안 하려고 일부러 "이게 뭐지?"이러고 있었죠, 가증스럽게,ㅋㅎㅎㅎ)
하지만, 비엔날레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있어서,
굉장히 머리를 즐겁게 해준 경험을 하게된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가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