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아는 주변사람들이 들으면, '니가?'를 연발하며 손담비의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는데,
최근에 L군의 옷을 골라주었다. 뭐 안다. 나 옷입는 것부터 신경써야한다는 걸,
근데 내가 옷을 못 입는 것과는 실정과 달리 난 생각보다 옷, 그러니까 복식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무슨 트렌드라던가, 그런 거엔 사실 관심이 전혀 없는데,
어떤 상황 하에서 복식이 주는 신뢰성의 구현에는 관심이 증폭되는 편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설명하려면,
뭐 어떤 분이 내가 옷 입는 방법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부터 해야하니, 이만 짧게 줄이도록 하고,..
뭐 어쨌든 프로젝트 런어웨이에 나오는 남자 디자이너들처럼
유독 엘레강스한 면이 증폭된 성격과 굉장히 거리가 있지만,
'무언가에 걸맞는가 걸맞지않는가''이를 통해 만남에서 어떤 이득을 보일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복식에 대한 정보와 운용에 관심이 많고 또 그에 따라 지식을 학습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스캇 슈만의 '복식은 위엄이다'란 표현에 대해 깊은 동의를 보내는 바이다.
이 경향성을 그런 선상에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바로 그런 이유 탓에, 그런 면모가 대화 중에 조금씩 비춰서
주변 친구들 틈에서 "옷 살꺼면 쟤랑 가라"는 추천을 받고있는 형국인데,
여자친구가 있다면 굳이 나랑 갈 이유가 전혀 없건만,
대부분이 없는 형국인지라 보통 날 데리고 가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내가 갖고있는 지식이 어떤 교과서적인 수트 복식에 한정되어 있다는 건데,
내 친구들은 "데이트용 의상'이라느니, '소개팅용 의상'이란 식으로,
내가 구현해내기 어려운 그런 복식들로 골라주길 바라는 거다.
근데, 내가 무슨 능력이 있나...
그냥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친구들 팔 걷어 피부톤 한번 보고, 목욕탕에서 본 체형보고,
그걸 기조로, 매장가서 옷을 고를 수 있는 색상안을 제시하고,
무엇보다 맞는지, 안 맞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부여하는 것 밖에 없다.
적나라한 "소개팅용 봄의상"을 부탁한 L군도 뭐 그런 식으로 하면 될 줄 알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인의 취향에 나온 이민호처럼,
파스텔 색상의 면소재 캐주얼 수트 형식, 캔버스화 정도로 생각하고,
약속장소로 정한 명동에서 옷을 고르는데,
아니, 근데 이게 왠 일? L은 너무 말라 정말 매장마다 사이즈가 없었다.
난 우리나라에 이렇게 의류 사이즈 선택권이 없는 사람이 있는 줄 정녕 몰랐다.
아니 그것보다 우리나라 의류 매장이 이렇게 편협한 사이즈망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정말 가슴사이즈 95 이하는 옷을 도무지 입을 수가 없었다.
가봉하면 되지 않겠냐하지만은 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가다가 있어야 가봉을 해도 하지.
뭘 맞추어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옷이 있기도 했다.
이 친구가 더블 브레스티드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서 놓치긴 햇으나.
기가 막히게 어깨 떨어지고 허리 감싸는 재킷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가격 앞에 지지부진하게 망설이다 구매실패.
왠지 피곤한 주말 저녁, 집에 가서 빨리 쉬고픈데,
이러다간 저녁 늦게까지 못 쉬겠다 싶어서
"야. 너 예전처럼 옷입을 꺼면 그냥 혼자 골라. 나보고 골라달라매?"로 살짝 강짜를 놓은 후,
이 친구를 데리고 달라붙기로 유명하며 여기보다 부담이 덜한 유니클로로 이동했다.
유니클로라고 뭐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바지를 고르는데, 남자 코너에서는 바지 사이즈가 도저히 나오지않았다.
말라있는 체형일수록 달라붙게 입는 것이 강점발휘하는 거라 들었는데,
슬림핏이니 뭐니 다 걸쳐도 안 붙는 거였다.
스키니고 뭐고 다 해봤지만, 무슨 중국 강아지처럼 다리가 주름만 접혀있더라.
(근데 유니클로 남자 스키니는 왜 32부터 시작인가?
알고봤더니 유니클로에서 스키니란 개념은 그냥 스판소재에 불과한 것 같다.
유니클로에서 우리가 알고있는 스키니란 개념은 '레깅스'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듯 하다.)
허리도 한참 남지, 엉덩이는 그야말로 공기 들어간 풍선같더라.
시간도 너무 늦었고, 뭐 사실 이대로 입어도 상관은 없다. 집에 가서 좀 빨리 가서 할일좀 하고 쉬자 싶었지만,
옷 골라달라고 부탁받고 여기까지 왔는데 여전히 후줄근하게 옷입도록 '그냥 사라'하기 그래서,
사이즈가 있을 여자 바지 코너로 갔다.
....
물론 내 입장에서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고, 철판을 두른 듯한 얼굴이 필요했다.
아마 그 매장에서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여자바지코너에서 사이즈 확인하고 몇개씩 쑥쑥 빼는 모습이
장관이었을 듯 하기도 하다.
근데, 그래도 친구니까. 얘도 솔로생활 정리하고 행복해지는 거 뭐 나쁘진않으니까하는 마음에,
용기를 내어 바지를 골랐다.
얘를 10년 넘게 알았지만 허리사이즈가 정녕 25인치인지는 몰랐다.
유니클로는 게다가 좀 붙는 거 아닌가? 근데 25인치 쑥쑥 잘 들어가더라.
입는 게 신기해서, 한번 25인치 '레깅스 진'을 한번 넣어봤다.ㅋ
...입더라. 32살 남자가 25인치 사이즈의 레깅스진이 착용이 되더라....
괜히 얘가 잘 못 한것도 없는데, 순간 '미친놈'이란 단어가 입에 맴돌았다.ㅋ
그런 방식으로 결국 바지 몇벌을 구매하고,
'재킷은 죽어도 저거다, 니 아동복 체형에 맞는 재킷따위가 있을 쏘냐.
신이 점지해준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질러라'
이렇게 세뇌를 하고나서,
"야, 근데, 너 키 작아서 그렇지 몸은 완전 모델이드라. 비율이 예술이야.
너 따위가 다리가 길 줄이야...." 뭐 이런 칭찬으로 이 날의 만남을 정리를 이끌었다.
그 친구가 고맙다고 했다.
나중에도 옷 고를 때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됐고, 그냥 여친이 골라주는대로 입고다녀"라고
장미빛 미래가 있을 것만같은 이야기를 건네줬다.
그날 쇼핑하면서 든 생각인데,
참 얘도 복식이라던가 여러가지로 여성에게 어필하고 싶을텐데,
소수라는 이유로 그런 기능을 발휘할 공간이 없어
옷을 찾으려고 부던히도 돌아다니던 모습이
어떤 보편성의 시각에 쳐받혀
사회에 누락된 것처럼 비춰지는 듯해서 좀 그랬다.
예전에 180이 넘으면 위너, 안 넘으면 루저라고 이야기했던 방송사건도
어떤 큰 화두로 작용해서 누군가는 직장을 잃고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어질 지경까지 치닫기도 했지만,
현실은 이처럼 그 보편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질 못하는 걸 보면,
어쩌면 이 보편성의 테두리는 우리가 평생 허우적대야하는 지평선일런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뭐, 어쨌든, 나는 L군의 소개팅에 건투를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