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대화

아버지의 서류가방

johnjung 2008. 6. 30. 23:55
오늘 오전에 급히 여권을 찾아야할 일이 있어, 방을 뒤지다가,
우연히 제 책상 밑의 서류 가방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외형상으로 보아도 구형으로 보여지는 쌤소나이트 가방,
여권을 찾다 찾다 지친 마음에 "혹시 여기에 있는 건 아닌가"하는 마음에,
가방을 열어 보았습니다.

가방을 열자, 잘 정리된 수첩들과 여러가지 측량용구로 보이는 도구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 그렇구나. 아버지께서 오래 전에 쓰시던 서류 가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모 건설회사에서 근무하셨었는데, 그 곳에서 쓰시던 측량용구와 회사수첩, 예전에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하셨을 때 사용하셨을 외국인노동자 관련 수첩, 뜬금없는 벨트와
회사에 다닐 때, 가지고 계셨던 명함이 들어있더군요.

왠지 아버지 명함을 하나 가지고 있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한장을 빼어들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이제 남은 게 이런 명함 밖에 없다는 생각에 왠지 허망해졌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병으로,...아무래도 직장생활 도중 얻은 스트레스가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면, 오히려 가족이었는지도요.
그 당시에 아버지는 병에 대한 선고를 받으시고, 이어 그와 관련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을 그만두시고, 집에서 쉬고 계셨는데,
집에 있는 걸 못 견뎌하시고, 회사로 빨리 복귀하시려고 서두르셨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병이 재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린 어머니에게 하신 말.
"내가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는 말씀,.
아버지는 회사 복귀 후 끝내 재발한 병으로 인해 돌아가시게 되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아버지가 좀 더 집에서 안정을 취하셨더라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꺼라고,...
그래, 아버지에게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자신이 생각하던 장남으로서의 입지에서 어긋나지 않는 자존심과 지켜야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던 모양입니다.

남은 가족들은 그런 모습보다는 보다 더 옆에 있어주길 바랬는데 말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보여준 그 모습들은 제게도 큰 의미로 와닿아 있습니다.
물론 방식은 다르지만, (저라면, 가족들과 더 함께하는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가족"이 삶 속에서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해주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내일은 저희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너무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마저 가물가물합니다만,
왠지 오늘만큼은, 당신에게 아들로서 생일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행동이 그저 무모한 모습만은 아니었다고,
당신이 남긴 것은 저런 물건들과 명함같은 것들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에 대한 소중함이었다고,
이 아들은 덕분에 그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걸 함께 말씀드리고 싶군요.

생일축하합니다. 아버지.
제가 표현하는 모습은 당신과 다를지라도, 우리가 중점하는 가치는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제가 어긋나지 않도록 지켜봐주세요.